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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인의협][이승홍][이승홍의 맞울림] 술 권하는 ‘산업 활성화’

작성자 : 관리자 2020.06.28


 

이승홍 ㅣ 녹색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진료 경험이 쌓일수록 가지게 되는 확신 한가지가 있다면 술은 알려진 것보다 무서운 약물이라는 점이다. 알코올의존에 빠진 환자들의 치료가 어렵기도 하지만 병원조차 찾지 않는 알코올의존증 환자로 인해 그 가족들이 겪는 무수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술은 뇌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고위험 음주를 지속하게 되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다루는 모든 종류의 정신병리가 유발될 수 있다. 불면이나 기분저하 등 비교적 가벼운 증상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 환각이나 현실검증력 손상, 나아가 치매에 준하는 인지기능 상실이 뒤따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술을 기호음료로 인식하지만 술은 사실 신경정신약물에 해당한다. 물질 자체가 가진 의존성 유발 정도도 높은 편이다. 2007년 영국의 의학 학술지 <랜싯>(Lancet)에는 20가지 중독성 물질에 대한 의존성 문제를 비교한 연구가 실렸는데 알코올은 아편, 코카인보다는 낮지만 필로폰, 대마, 엑스터시보다 높은 의존성 문제를 가진 물질로 분석되었다. 영양가도 없는 것을 오로지 정신을 취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면서도 사람들은 본인이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술에는 각종 문화적 정취가 담겨 있고 또 그것이 상품화되는 과정에서 예쁘게 포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 입장에서도 약물이라는 인식은 술맛을 떨어트릴 뿐이다. 하지만 담배를 즐기려는 사람이 원치 않는데도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담배 포장지에 그 위험을 알리는 사진을 새기는 것처럼 술에 대해서도 금주 정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술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술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는 것이다. 술을 판매하는 곳이 제한적이고 거주지에서 멀수록 알코올 사용 문제의 빈도는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술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알코올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호소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골목마다 보이는 편의점에서 모두 술을 팔고 있어 퇴근 후 집에 가는 길에만 열번의 유혹을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묶음 할인 맥주로 ‘혼술’을 즐기기 시작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루는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도 흔히 보게 된다.

 

최근 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우려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달 기획재정부는 주류 제조와 판매에 대한 전반적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술을 찾기 위해 집 밖에 나갈 필요조차 없도록 가정으로의 주류 배달을 허용하는 한편, 주류업체는 다양한 맛의 술을 제조하고 홍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지 국내 주류업계의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주류 소비가 증가하면 그에 따른 대가는 위험 음주의 길로 빠져드는 개인뿐만 아니라 주취 행동과 관련된 각종 사건 사고를 감당해야 할 사회 전체의 몫이 된다.

 

지난 6월25일 산업통상자원부는 ‘규제특례심의위원회’를 통해 8건의 안건을 승인했는데 이 중 하나가 인공지능(AI) 무인판매기로 술을 판매한다는 ‘인공지능 주류자판기’ 사업이다. 인공지능까지 동원해 술을 권해야 경제가 산다는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이날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한 비대면 진료도 승인되었다. 원격 진단과 약물 처방까지 허용하는 본격적인 원격의료다. 재외국민 한정이라지만 전형적인 문틈에 발부터 끼워 넣는 전략이다. 재외국민들은 안전성과 효과성을 검증받지 못한 원격의료의 시험 대상이 되어도 괜찮다는 것일까. 국민 건강에 중요한 문제들임에도 산업 활성화라는 명분하에 경제 관련 부처에서 규제 완화를 밀어붙이는 행태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산업 활성화라는 환상에 취한 정부가 국민들의 건강을 허물어트리는 모습이다.

 

 

녹색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1271.html#csidxec08055b0cf49e0840e7b8846a14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