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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진국칼럼] 정치인들의 역사의식

작성자 : 관리자 2004.08.24

[영남시론] 정치인들의 역사의식



김진국<의사·신경과 전문의>



그리 길지 않은 우리 정치사에서 정권 출범 초기에 '과거청산을 통한 새시대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았던 정권은 없었다.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독재정권들조차 구시대·구악의 청산을 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음을 우리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이 내세운 과거청산이란 명분은 늘 정치세력의 질서재편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을 뿐, 정작 국민에게 약속한 새시대는 국민과는 무관한 것이었고, 오로지 권력층 그들만의 시대를 위한 말잔치에 불과했다. 그 결과 건국 이후 지금까지 줄곧 우리 사회의 과거는 미래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남아 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배경에는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잔재의 청산이 이 정부에서만큼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17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제야말로 진정한 과거청산을 이루어 달라는 국민의 간절한 열망이 반영된 결과일 터이다.

과거청산에 대한 이런 국민의 요구를 수렴하려는 듯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8·15 경축사를 통해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 이전에도 노 대통령은 국민에게 '유신'과 '미래' 중에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선택을 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사 진상규명의 당위성이나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발언에서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잔재를 털어 낸 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미래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확인할 수 없었다. 더욱이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사에 짙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미국, 그리고 일본과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난데없이 우리 역사를 폄훼하고 나서는 중국의 횡포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과거청산의 진정한 목적은 권력의 힘으로 묻혀있던 과거의 사실을 들추어내어 누구를 처벌하고자 함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서 얻은교훈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토양을 다지고, 미래에 대한 전망과 우리 사회 전체가 보듬고 가야할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급히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과거는 '힘이 곧 정의'로 용인되던 야만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현실을 개혁할 아무런 동기도,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다. '힘'은 여전히 정의로 통하고 있다. 단지 힘을 얻는 절차와 그 힘을 행사하는 인물들이 달라졌을 뿐이다. 경제적 힘이 없는 사회의 약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절망의 벼랑 끝으로 밀려 나 있는 것은 하나도 변함이 없다. 온 지구촌에서 살육과 파괴를 일삼는 미국의 힘은 이 땅에서는 여전히 숭배와 추종의 대상이다. 참여정부가 청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신정권의 개발정책과 가녀린 한 비구니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참여정부의 개발정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과거사에 대한 냉철한 역사의식도, 현실을 개혁할 의지도, 미래의 전망을 세울 철학도 없는 집권층이 주도하는 과거청산에 대해 야당대표가 맞불을 지피면서 과거청산이란 우리 사회의 절박한 과제는 엉뚱하게도 정치권의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천박한 싸움거리로 전락해가고 있다. 역사는 결코 승리자의 전리품일 수는 없으며, 권력의 의도에 따라 함부로 재단될 수도 없는 것임에도 역사를 감히 정쟁의 도구로 삼는 그 용기들이 놀랍다. 그런 한편에서는 역사를 놓고 여·야 정치권의 흥정과 타협이 벌어지고 있다.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다. 내일의 희망이 없는 오늘의 살풍경스러운 모습은 제대로 청산되고 단죄되지 못한 어제의 잘못에 그 뿌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어제의 잘못이 어찌 정쟁의 대상일 것이며, 흥정과 타협의 대상일 수 있겠는가?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과거를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늘의 '힘' 역시 내일이 오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역사로 편입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