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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진국칼럼] 진군의 북소리도 없이....

작성자 : 관리자 2004.08.12

진군의 북소리도 없이


『영남일보 <영남시론>』(2004년 8월 7일(토))



김진국 (의사, 신경과전문의)




기어코 가버렸다.

가려거든 "우리를 밟고 가라" 했더니 보라는 듯이 짓밟고 가버렸다. 지난 3월의 밤하늘을 밝혔던 그 수많은 촛불들을 한숨에 훅 불어 꺼버리고 가버렸다. 죽음의 땅으로 떠나는 전사들은 꼭 살아 돌아오라는 눈물 섞인 배웅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진군의 북소리, 나팔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여당의 의장, 그리고 많은 국민까지 가마솥 더위를 피해 느긋한 휴가를 즐기고 있는 틈에 병사들은 도둑고양이 담 넘어가듯 새벽공기에 몸을 숨긴 채 그렇게 먼길을 떠나고 말았다.

정녕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면, 애걸복걸 살려달라 몸부림치던 한 젊은이의 간절한 호소를 싸늘하게 외면하며 테러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노라 객기를 부리던 그들이, 정작 테러를 응징하러 떠나는 전사들의 모습은, 왜 이렇게 비굴하고 초라해야만 하는지 좀 소상히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전범국가의 대열에 들어서는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챙기려했던 국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이제는 좀 자상하게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에도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대통령도, 집권여당의 대표도 말이 없다. 염천의 하늘 밑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하다 쓰러진 소수 야당의 대표가 간곡하게 부탁한 면담요청에 대해 청와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부·여당과 사생결단을 낼 듯이 싸우던 언론들도 정부의 보도자제 요청 한마디에 다소곳이 꼬리를 내리면서 상생의 관계로 태도를 바꿨다.

그리하여 국익의 실체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휩싸인 듯 도무지 그 모습을 종잡을 수가 없는데, 정작 지금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현실은 죽음의 위협이요, 점점 깊어지는 절망의 골이다.

이슬람의 무장세력은 사방팔방에서 맨몸인 대한민국 국민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데 청와대와 정치권은 허깨비 같은 유신의 망령과 싸움박질만 해대고 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시대는 유신으로 거슬러올라가고 있다.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고, 보도통제가 이루어짐으로써 국민의 알권리가 무시되고, 파병반대의 목소리는 경찰 방패에 가로막혀 있지 않은가? 헌법재판소는 유신시대 때나 들을 수 있을 법한 통치행위란 말로 우리 헌법이 부정하고 있는 침략전쟁을 강행한 대통령의 결정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정부·여당이 과거청산을 부르짖고 있다.

자신의 임기 중에는 일본에 대해 과거사 문제를 거론치 않겠다는 대통령의 아량과는 달리, 집권여당의 의원들은 군부독재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의 친일문제까지 청산하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이에 부역하며 우리 민족을 핍박했던 이들의 죄상을 단죄함으로써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혼란스럽다.

국민들의 생명을 벼랑끝으로 내몰면서까지 미국의 침략전쟁에 부역하고 있는 이들이 무슨 명분으로 일제 침략전쟁의 부역자들을 단죄하겠다는 건지 정말 혼란스럽다. 그들의 과거사 청산의지가 진정으로 올곧은 역사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일본 총리를 만난 집권여당의 대표는 친일청산법은 순전히 국내용일 뿐이라 설명했다.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한반도 역사를 노략질하고 있는 이 다급한 상황에서, 여당 대표는 이국 땅에서 국내와 국외의 역사를 구분하는 외교수사를 늘어놓고 있다.

국내에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가 있다면 그 뿌리는 국외에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 역사의 비극 아니겠는가? 그 뿌리를 제대로 잘라 내지 못했기에 국외에서 불어오는 침략전쟁의 광풍에 우리가 휩쓸려가고 있는 것일 게다.

총 한자루에 목숨을 의지한 채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들을 위해 진군의 북소리 한번 울려주지 못했던 것은 그래도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알았기 때문일까? 부끄러운 줄 안다면 더 이상의 희생이 생기기 전에 돌아오게 해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과거사 청산의 첫 걸음이다.